바라건대...

참된 사랑의 네가지 모습

misslog@hanmail.net 2011. 2. 7. 14:09

 

참된 사랑의 네가지 모습

 

 

 

참된 사랑의 첫 번째 모습은, 기쁨과 행복을 주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이다.

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깊이 보고 듣는 수행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준다면 그것은 마이트리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이해가 결여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소망하며, 또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이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므로 그 참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마이트리의 어원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이다. 실제로 불가에서는 사랑의 근원적 의미를 우정으로 본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사랑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을 키워가며 이 엄청난 에너지의 원천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 심지어 그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사랑의 두 번째 모습은, 고통에서 놓여나게 하고 슬픔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카루나(karuna)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자비의 감정을 키우기 위해서는 숨쉬기 한 번도 신중하게 해야 하며 깊이 보고 듣는 수행을 해야 한다.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앉는다. 그리고 그의 고통에 접하기 위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를 살피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럴 때 우리는 그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괴로움은 어느 정도 덜어진다.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풋내기 승려였던 시절의 일이다. 나는 세상이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붓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붓다는 어째서 그 모든 번뇌와 고통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일까.

나중에 나는 붓다가 이해와 평정심, 그리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번뇌와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은 것이다. 붓다는 번뇌와 고통을 다독여서 다른 형태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기에 그것을 향해 미소를 머금을 수가 있다. 우리는 번뇌와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만 평정심과 침착함, 그리고 내면의 힘을 잃어선 안 된다. 그래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비가 있는 한, 슬픔이 넘쳐 눈물의 바다가 만들어진다 해도 그 바다는 우리를 익사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그토록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이유이다.

 

참된 사랑의 세 번째 요소는 무디타(mudita), 즉 기쁨이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불경 해설자들은 행복은 몸과 마음 모두와 관계가 있는 반면, 기쁨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관계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예로 흔히 이러한 비유를 들곤 한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시원한 물줄기를 보고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면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돌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들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 주며, 눈만 좋은 상태이면 깨우침 또한 얻을 수 있다. 눈을 뜨면 푸른 하늘과 청보라색의 꽃들, 아이들, 나무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수많은 형상과 색채들을 볼 수 있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 들어 있으면 이 경이롭고 신선한 것들을 접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기쁨이 차오른다. 기쁨속에는 행복이 들어 있고 행복 속에는 기쁨이 들어 있다.

 

무디타는 평온과 만족으로 가득한 기쁨의 상태로 해석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의 행복을 기뻐할 수도 있다. 스스로가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기쁨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참된 사랑의 네 번째 요소는 평온과 무심함, 판별하려 하지 않는 무념의 상태, 혹은 놓아줌을 의미하는 우페크샤(upeksha)이다. 우페는 '~너머'를 뜻하고 크쉬는 '보다'를 뜻한다.

우리는 어느 한 면이나 다른 면에 한정되지 않은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사랑 속에 애착과 판별, 편견이나 집착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우페크샤는 즉 '평등의 지혜'라 불리는 표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곧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구분을 짓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볼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설령 우리 자신이 깊숙이 개입된 갈등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 모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차별과 편견의 허물을 벗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 만일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받는 존재로 본다면, 혹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존재로, 그들과 다른 존재로 본다면, 우리에겐 참된 의미의 평정심이 없는 것이다.

 

우페크샤(평정)가 없는 사랑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여름날 부는 한 줄기 바람은 참으로 상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깡통속에 넣어 영원히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려 든다면 바람은 죽어버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구름과 같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같으며 꽃과 같다. 그런 그를 깡통 속에 집어넣어 가두려 든다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마침내는 그가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사랑한다 말하지만 상대방이 무엇을 소망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는 셈이 된다. 참된 사랑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그대로 지켜가게 해준다. 그것이 우페크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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