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뜨다
풀의 신경계 ................ 나희덕
misslog@hanmail.net
2014. 7. 1. 21:58
2014. 6. 10. am 10:45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흙 위에 돋은 혓바늘처럼
흙의 피를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는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넘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 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다
풀 속에서는 풀을 볼 수 없고
다만 만질 수 있을 뿐
제 몸을 뜯어 달아나고 싶지만
뿌리박힌 대지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는 풀,
그 소용돌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고
나는 자꾸 말을 더듬고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고
풀은 너무 멀리 간다
더 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
...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