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뜨다

영혼의 문제 ....... 심보선

misslog@hanmail.net 2015. 6. 29. 17:03

 

 

                                                                                                                                                      2015. 6. 23.  pm 1:14

 

 

 

1

칼바람이 불던 지난해 겨울 어느 날 나는 한 예술가와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날은 휴일이었고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 변두리 주택가에 위치한 허름한 식당이었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식당 주인 내외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낯술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주문을 하고 우리는 아마도 시국이나 예술판에 대한 그렇고 그런 논평과 가십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주인 내외의 술판은 꽤나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주방에서 우리에게 내줄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중년의 아저씨는 그저 묵묵히 독작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감자기 한 사내가 섀시로 된 미닫이 문을 꽤나 시끄럽게 밀치고 들어오면서 식당 안이 떠나가라 외쳤다. " 형님, 일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 잔뜩 굳은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아저씨가 그 사내를 보고 겸연쩍다는 듯 씩 웃었다. 가뜩이나 건성으로 임했던 예술가와의 대화는 그때부터 더욱 더 재미가 없어졌다.

 

대신에 나는 도대체 대낮부터 식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 우울한 분위기는 무엇이며, 이 사람들의 관계는 무엇이며,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밥을 먹으면서 눈치껏 보고 들으며 파악한 대강의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건설 일용직인 아저씨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현장감독과 시비가 붙었다. 자존심이 상한 아저씨는 그 이후로 일을 나가지 않고 있다. 현장 감독은 아저씨를 설득해서 다시 나오게 하라며 이 사내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꽤나 고집이 세서 사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내는 이 불경기에 그나마 어렵게 구한 일을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세우려고 이렇게 쉽게 내쳐도 되는 것이냐며 아저씨를 어르고 달래보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난감하고 갑갑한 형국이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두 남졍네의 대화를 들으면서 빈 술잔을 채워주던 아주머니가 아저씨에게 버럭 야단을 치듯 말했다.

 

" 당장 일 나가! 내가 당신에게 일을 나가라고 하는 건 자존심 굽히고 돈 벌어오라는 게 아냐. 일 안 나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뭐하는 짓인지 알아? 이건 영혼을 낭비하는 짓이야!"

 

나는 밥을 뜨다 말고 아주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색색의 크레파스로 함부로 칠한 것 같은, 촌티가 풀풀 나는 화장, 미용을 목적으로 했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싸구려 파마, 인생의 피곤과 궁핍이 잔뜩 찌든 남루한 인상, 그러나 그런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영혼"이라는 단어의 울림은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2

 

그렇다. 모든 것은 결국 영혼의 문제다. 아니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시를 쓰는 것이나, 예술을 하는 것이나, 허름한 식당의 주방일이나, 일용직 노가다나, 그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그 영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는 그 영혼이란 무엇이냔 말이다.

 

내가 여기서 캐묻고 싶은 영혼의 의미는 어쭙잖은 평등주의나 '노동의 신성함'과 같은 구태의연한 개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아주머니에게 영혼이 뜻하는 바, 영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바와 내게 있어 영혼이 뜻하는 바, 영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바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자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영혼의 부름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응답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결국, 영혼의 문제다, 영혼의 목소리를 따라 그 아주머니나 나나 자신에게 고유한 인간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은 자존심이나 생계처럼 모든 이에게 통용되는 가치나 필요성을 따르는 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 길은 겉으로는 창작의 길일 수도 있고, 노동의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의 이면에는 비밀스런 또 다른 길이 깔려 있다. 보이는 길 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 명명될 수 있는 길과 명명될 수 없는 길,

 

그 둘 사이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길은 어찌됐든 굽이굽이 이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제는 없었던 새로운 지평선을 향하여.

 

나는 지금 그날의 식당을 떠올린다. 그날 나에게 내던져진 '영혼'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에게 영혼이란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종교적인 광휘가 둘러싸인 신비로운 어구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평범한 아주머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육성이요. 일상의 고통으로부터 터져 나온 파열음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성좌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태도들의 사이에서, 몸짓과 말투 속에서, 모종의 신호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그때 영혼은 일상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지리멸렬과 강박과 예속에 대해 매순간 저항하게 하고, 망설이게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어색하게 한다. 영혼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거나 계몽된 상태에 다다르게 하지 않는다. 영혼은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영혼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어떤 순간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 그것은 놀랍도록 웅변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참할 정도로 어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은 최소한 그 말과 행동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그날 식당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할 것인 지도 모른다.

 

"공사현장으로 가서 기꺼이 철근을 이고 벽돌을 날라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이 당신에게 강요하는 노동을 당신 자신의 영혼운동으로 바꾸어라."

 

 

 

3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은 점점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화한다. 영혼은 수많은 씨니피앙으로 분화하고 전개하며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한때 고색창연했던 씨니피에와의 고리를 끊어버린다. 영혼은 한낱 농담으로부터 최첨단 인공지능을 거쳐 지고의 성령에 이르는 드넓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영혼은 광고와 자기 계발서와 여행에세이와 심리상담의 이데올로기 효과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영혼은 인디 문화와 뉴 에이지가 휘날리는 A4용지만한 토템의 깃발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영혼의 생산과 소비를 독점함으로써 영혼은 속물들의 유기농 식단 정도로 전락한다.

 

반면 자본주의의 최대 희생자들, 목소리와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은 최소한의 자기존엄조차 방어하지 못하며 동물화의 길을 걷는다. 그들에게 영혼은 가끔씩 손에 쥐어지는 몇 알의 영양제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물이든 동물이든, 말과 행동을 수행하는 한, 그러면서 나날이 새로운 사건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통과해 가는 한, 인간은 어디선가 불현듯 들려오는 영혼의 희미한 모스 부호 소리에 감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인간은 어제는 없었던 새로운 지평선 쪽을 향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을 감행할 것이다.

 

 

 

4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말 그대로 '다르다'는 의미이지 시 안쓰는 내가 시 쓰는 나보다 열등했을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시를 쓰면서 나는 어떤 특정한 영혼의 부름에 응답하게 됐을 뿐이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종류의 영혼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혼일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를테면 나는 회계사의 영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장부 속에 숫자들을 적어 내려가면서 느끼는 회환과 혼란과 쾌락이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혼이 있는 회계사를 친구로 두는 것은 왠지 좋은 일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 파리가 나에게 선사한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길을 잃도록 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나는 바꿔 말하겠다. 시가 나에게 선사한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길을 잃도록 해준 것이다. 시는 나로 하여금 인생의 일부를 탕진케 하였다. 이 사회가 잉여( surplus)를 창출하기 위해 생산성과 혁신을 장려한다면 시는 오히려 소여(surminus)에 대한 무모하고 어리석은 상상을 자극한다. 소여란 비생산적 창조 활동이다.

 

소여란 초과하는 부재다. 소여란 무한의 뺄셈 끝에 다다르는 지평이다. 소여한 패이승의 정신이다.

 

나에겐 직업과 일상이 있다. 현대 세계에서 개체보존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자원은 대부분 직업과 일상으로부터 나온다. 그런 식으로 나의 존재는 세계의 영속적 질서의 일부가 되며 직업의 수행과 일상의 영위를 통해 그 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한다. 나는 잉여를 창출하라는 명령과 그러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라는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돼 있다.

 

개체보존을 위해 나는 대체로 그 같은 요구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 쓰기는 그 요구들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힘을 제공한다. 어머니에게 나의 첫 시집을 드렸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애썼구나. 그런데 쓸 데 없는 일에 너무 시간 뺏기지 마라." 나는 그때 속으로 말했다. '어머니, 시에 대해 정확히 보셨군요. 그런데 저는 사실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습니다.'

 

어쩌면 나의 직업과 일상조차, 말하자면 세계의 영속성에 기여하는 활동들조차 소여의 상상력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오피스에 고독의 무대를 숨겨 놓기로 한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유희의 장치들을 발명하고 그것들을 동료들에게 은밀하게 전파한다. 나는 탈퇴하는 마음으로 가입한다. 나는 다이어리에 혼돈의 기록을 남긴다. 나는 회의 때마다 참석자들에게 지구 멸망의 날을 환기시킨다. 나는 모든이에게 만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된다.

 

내 자신을 경원시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 나의 여가는 남의 여가를 훼방 놓기다. 나의 데이트는 매번 이별의 리허설이다. 나는 길거리에서 내가 모르는 이와 감동적으로 포옹할 순간을 고대한다. 나는 죽음을 망각하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면서 살아간다.

 

 

 

5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왜 이렇게 나는 영혼의 문제에 집착하는가? 영혼이 인간을 온전히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니까? 이런 대답은 너무 뻔하다. 그러니 다른 대답을 찾아보자. 영혼은 행복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영혼은 행복을 귀중한 선물처럼 안절부절 다르지 않는다. 영혼은 불행하게도 손을 건넨다. 그리하여

 

영혼은 불행과 행복의 차이를 지우고 그 둘을 동등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한 삶의 의미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마찬가지다. 영혼은 의미와 무의미를 같은 장소로 데려온다. 영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영혼은 오늘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렴시켜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

 

영혼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진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혼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혼의 목소리에는 도저하고 엄정한 요구가 담겨 있다. 영혼은 목적어의 자리가 텅 빈 명령어와 같다. 영혼은 어쩌면 허튼 소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허튼 소리다. 영혼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경이로운 역설이요.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영혼 때문에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영혼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산다.

 

영혼은 나의 시와 나의 삶을 뒤죽박죽 섞어버린다. 그렇다. 그러니 지금 영혼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미명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내가 시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저 미명 이후의 아침만이 나의 유일한 윤리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 심보선 詩 <시와 사상> 2009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