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뜨다

흐린 날에는 ........ 나희덕

misslog@hanmail.net 2011. 11. 6. 21:21

 

                                                                              Munch 作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밝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어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