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뜨다

흉터, 어느 작부로부터의 편지 .................. 김신용

misslog@hanmail.net 2012. 2. 17. 17:03

 

 

 

                                                                             Jola Bakoniuk 作

 




-엉망으로 취해, 뱃놈 인생은 말짱 개털이라고 내 남루한 치마폭에 오물을 게워놓고, 폐선 속의 쥐새끼처럼 하룻밤 내

썩은 몸뚱이를 다녀가신 선생님께-


바다 위에 노을이 타오르면 온몸 석유 끼얹고 분신하던 그 이의 모습이 보여요. 와락 그 불덩이를 껴안았다가 얻은 왼쪽

얼굴과 귀밑 목덜미에 번져 있는 그 火傷(화상), 제 섬이에요. 낡은 통발배가 버려진 고무신짝처럼 떠 있는 남해의 작은

落島(낙도), 밤이면 선창의 붉은 불빛 객혈처럼 흐르는 좁은 술집 골목, 술자리에서 번번이 쫓겨나던 작부....,그래요. 그

흉터의 섬, 견고한 바다의 물결로 첩첩이 벽을 쌓은 제 감옥이에요. 철조망 번뜩이는 탐조등은 없지만 스스로 벽을 쌓아

유폐된 감옥, 절해 고도...

그이가 살아 있었다면.... 온몸 멍처럼 시퍼렇게 물들이는 바다의 저 푸른 쪽빛, 마치 농익은 오얏을 깨물 때의 그 상큼한

맛으로 내 오관을 저리게 했을지도...... 철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저 핏빛 동백, 내 목에 화환으로 타올라 세상의 가슴에 내

꽃무늬 화사한 문신으로 새겨졌을지도....

그러나 저는 알아요. 스스로 갇힌 이 감옥,세상을 향한 집념,인간을 위한 모든 욕망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포근한 고절감,

또 이것이 얼마나 끔찍스런 감옥인가를. 그 안온함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며 또 얼마나 뼈저린 자기 방기인가를. 저는 알

아요. 자기 위안의 내 견고한 섬, 허망 위에 허망을 쌓아 물거품만 허벅지게 피웠다가 덧없이 스러지는 포말의 집이란 것을.

흉터..., 그이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섬.이제 정분난 남정네가 주고 간 정표 같아요.죽어서 비로소 잉태된 그이의

흔적이에요. 온통 그믐밤처럼 꺼멓던 탄광촌, 제 몸 곡괭이가 되어야 살아남던 삶들,그들의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의 空洞(공

동) 같던 갱 앞에서, 스스로 온몸 불꽃 피워 어두운 삶을 밝히려 했던 그이, 몸 안주 삼아 들고 다니던 내 들병이 같던 세월,

썩은 몸둥이 무엇이 좋다고 밤마다 파고들어, 몸 던져 껴안아야 할 날들을 몸으로 말해 주던 그이.

그 흉터, 술맛 떨어진다고 흘러 흘러온 갯촌의 시린 술주정을 피해,얼굴이 밑천인 이 화류의 세계에서 내치는 손길 손톱 세

워들고 돼지 얼굴 보고 잡아먹냐고, 악머구리 몸부림 대신 홀로 어둠 속의 방파제로 나와 일렁이는 밤물결 앞에 서면, 마치

최면이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영원한 잠에의 유혹..., 그 허망이 지어놓은 집으로 돌아가서 그이와 함께 잠들 이불만 펴면

되는 것을.

그러나 선생님, 병도 오래 앓으면 수족 같은 정이 든다 했던가요?

얼굴에 술을 끼얹으며 썩은 내 품을 파고드는 비린 생선내음, 절이고 절여진 퇴락한 어촌의 그 한서린 세월, 그것 또한 내가

껴안아야 할 흉터가 아니던가요? 이 땅, 암호처럼 그이가 내게 주고 간 흉터, 그 살아 있는 날들의 의미가 아니던가요?

잡풀도 새들의 둥지를 짓는데....

 


... 김신용 시집 <몽유 속을 걷다> 실천문학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