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석운 作
그렇듯 성황을 이루고 있는 전람회의 개막식장에서 주인공이 처음 만난 내게 말했다.
"외로워요. 어젠 그림 날라줄 사람이 없어서 화랑 주인하고 둘이 애먹었어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부산한, 지나치게 강하고 씩씩해 보여 거리감마저 느끼게 하는 그녀의 외형과는 전혀 다른
이 말에 나는 또 한 번 절망감을 느꼈다. 아, 어쩌면 사람은 이리도 외로운 존재인가. 너무 황량하여 숨쉬기조차 힘
들었던 그 무렵 나더러 인상이 참 좋다며 자주 만나자고 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부족한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란 대체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을 오래 사귀는 비결은 상대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다 열어 보이면 남는 건 권태 뿐이다. 또 자신이 많이 주었다고 생각하면 상대에게 그만큼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원망하게 된다.
사람을 결속시키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건 사랑이 아니고 믿음이다. 사랑도 미움도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 혹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두면 된다. 굳이 감정에 맞서거나 어긋나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소모시킬 필요가 있
겠는가. 그것은 이중으로 상처를 내는 일이다. "내"가 아는 "그"는 좋든 나쁘든 분명 그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상대에게 대항하면 할수록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공허와 자신의 악한 모습만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종이 한 장의 차이일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자기 단련이 필
요한 것이고, 세상엔 공짜가 없어서 잃었다고 생각될 때 반드시 얻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장애물 경주에서 '자기'라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풍경과 같은 것이리라. 인간에게 있어 궁극
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할 때 모든 길은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자신에게로 집중된다. 모든 인간 관계는 오해의 관계이며 절
대가치는 신도 자연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사람은 다같이 고독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
는 것,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온갖 재능과 무모할 정도의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진 최대의 무기는 선(善)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산다. 생각하면 버릴 것이 너무 많고, 또 생각해보니 가진 것이 너무 없다. 나는 사람보다도
어쩐 일인지 자연과 인연이 깊었다. 그렇더라도 가장 그리운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사람이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몇 순간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 생을 통해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을 그런
완벽한 순간을 위해서, 그런 순간에 대한 동경과 미련 때문에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다행히 나는 그리
운 대상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들이 내 스승이고 벗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의 힘, 외로움의 힘을 믿는다.
... 권경인 시인 글 1997, <한국수출보험공사〉사보 7월호. 권경인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