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래.

혀를 위한 직설적인 상상

misslog@hanmail.net 2008. 8. 6. 20:10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펄펄 물을 끓인다. 커피의 그윽함을 상상한다.
한 모금 마실 때의 쌉쌀한 혀끝 느낌이 얼음 칼처럼 짜릿할수록
그 이후로는 아무래도 좋아, 하며 마시는 커피.
첫 느낌 강한 커피는 비밀의 맛을 간직한 요부(妖婦)다.
설송에 둘러싸인 집에서 새벽이 맞도록 편지를 쓰던 밤,
몇 잔의 커피를 연거푸 마셨는지. 그렇게 커피를 사랑하고
곁에 두어 빈 잔에도 주전자의 수증기에도 위안을 얻던 시절이 있었던가.
추억마저 가벼이 흘렀다. 잔을 다 비우도록 위로받지 못한 마음도
커피를 마시는 순간은 행복이다. 그리하여 커피에 빠진 나는 헤엄칠 줄을 모른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나누던 두 개의 이야기.
길들여지는 것들과 길들여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고독하였다.
갈잎색 포용과 폭풍의 저항이 어우러진 찻잔에 동그마니 눈길을 내리고
각양의 입맛으로 마시던 커피. 부딪히는 찻잔의 울림도 여러 가지였다.
우려낼수록 엷어지는 허브잎 차 옆으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한 진한 커피는
도도한 이방인의 모습처럼 선명하다. 그 매력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쩌다 만나도 지난 이야기들로 밤새워 알몸을 드러낼 수 있는 사이,
지루한 무용담을 거르지 않고 나누어도 싫증 내지 않는 사이,
그런 지기 같은 커피이기에 멀리서도 그 향에 비틀댄다.


아스라한 입맞춤. 세게 부딪히지 않아도 달군 찻잔의 모서리에
닿는 입술은 의당 연인의 입술이다. 결별의 찻잔이 아니라 따스한 찻잔,
그 안에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
텅 빈 들녘 곁 들꽃들의 건배로 울리는 찻잔이 그립다.
은은한 광휘와 반짝이는 불빛과 퀼트에 수놓인 빨간 추억들이
창문 틈새로 모락모락 번지는 모양을 가난한 시인은 기억한다.
세계의 미소와 생명의 겨우살이가 페이소스의 중력으로 재생되는 시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불만족의 체증을 가라앉힌다.
황홀한 익사를 꿈꾼다. 갈색 입맞춤을 한다.


꽃무늬 커피 잔에 끓는 물을 부으면 숙명처럼 녹아드는 커피.
황급히 커피를 마시다 입술에 화상을 입는다. 내 인생 언저리에 망울망울 물집이 생긴다.
친정엄마가 보낸 택배상자를 보며 어느새 나는 내 엄마가 되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손가락을 얼레빗 삼아 헝클어진 머리를 몇 번쯤 쓸어 올리기도 한다.
내 얼굴도 엄마만큼 단정해진다. 커피가 몸 안에 차츰씩 차츰씩 스며들 때
무심코 계단 앞에서 벽의 시계를 본다. 시침과 분침이 겹쳐 포개져서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향기와 애잔한 물방울과 피어오르는 입김과 짙은 속눈썹의 정갈함을 섞어 당신을 마신다.
나를 마신다. 여인의 찻잔 속에는 폭풍이 인다.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열정이나 추락이 아니라,
그곳까지 이르는 구질구질한 삶의 동반인 듯 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도처  에  병균과 죽음이 득실거리는, 아무도 손을 쓸 수 없는,
그래서 불안이고 혼돈인 이 상황에서 악을 쓰며 같이 싸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당신이 내 현실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누추하고 구차한 현실을 같이 나누다가
서로 뻔뻔해지고 치사해지기를 바랍니다. 추락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 김인숙의 부치지 못한 편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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