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래.

자잘한 기쁨도 나에겐 큰 기쁨이다

misslog@hanmail.net 2008. 11. 23. 11:43

 

 

 

 

 

 

                                                                                                                    Zena Holloway 作

 

 

 

 


행복이란 늘 변하지 않은 상태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혜인 것 같다. 지상에는 모든 사물들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것이든 변치 않고 고정된 양태로 언제까지나 계속 유지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우리 자신도 이 흐르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내일도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복을 누리겠다고 바라는 자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순간적이나마 정신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하찮은 잘못으로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조심이 너무 지나쳐 회상의 가능성마저 쇠사슬로 묶어두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행복하다는 사람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확고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무엇보다 나로 하여금 행복함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행복을 찾아내고 알아내려면 사람의 마음속을 읽어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자족감이란
그 사람의 눈짓, 태도, 말투, 걸음걸이 같은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만족을 찾아내는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축제에 몰려든 군중이 모두 기쁨에 넘쳐 있는 광경을 볼 때처럼 상쾌한 것이 어디 있으며, 온갖 모습으로 가려진 인생의 구름 사이로부터 휘황하게 비쳐 나오는 기쁨을 마음속으로부터 즐기는 것을 보았을 때만큼 설레는 즐거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날은 쌀쌀했으나 쾌청한 날씨여서 사관학교까지 산보했다. 꽃이 핀 이끼를 찾으려는 참이었다. 길을 거닐면서 지난날 찾아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기도 하고 달랑베르 시인이 썼다는 시구도 음미해 봤다. 내게는 감추고 저희끼리 쉬쉬하면서 내게 보인 뜻이 무엇이었던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했다.

일찍이 나는 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었다. 그것이 나를 인간 윤리에서 벗어난 아비로 규탄해댄 꼬투리를 그들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으로 몰아붙이자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발판삼아 층계를 오르듯,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재주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모여 놀고있는 것을 나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 없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P씨가 찾아왔던 한 시간 전 내가 살던 집 주인 수스와씨의 두 아이가 나를 찾아왔었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들은 내 목을 꽉 끌어안으며 즐거워 날뛰었고 나 역시 그애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찾아온 것을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사실이 아비답지 못하다는 무정한 인간들도 있지만 내가 고아원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그보다 더 비참한 운명의 골짜기로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토록 참담한 나의 운명을 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그때 그 아이들의 장래에 무관심했다면 혼자서 아이들을 기를 수 없는 내 처지로선 그 아이들의 어머니나 외가 친척들 손에 맡겨야만 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아이들은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을 것이고 외가 친척들은 그 아이들을 방임한 나머지 고약한 괴물쯤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마음을 알아내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면 아이들을 대하면서 느꼈던 기쁨에서 얻어낸 것뿐이리라. 그땐 아이들을 고찰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흥겹게 놀고 있는 그들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저작 《신 엘로이즈》나 《에밀》은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아예 호감을 살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내가 아이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내력이 있다. 아이들이란 늙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언짢게 한다면 나는 어루만지는 것도 삼가야겠다. 우연히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진실로 인간을 사랑하겠다는 애정의 발로다. 서로가 함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분명코 슬픔이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환경과 숨 쉬고 있는 세계는 가련한 아이들의 마음과 나의 성정이 서로 미소를 띠고 즐거움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애정으로 아이들을 어루만질 때 내가 순간적으로나마 그들의 맑은 눈동자 속에 담긴 기쁨과 만족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면 짧은 순간이나마 나의 불행과 고민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겠는가!

인간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그 상냥한 눈빛을 식물 세계에서나마 되찾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었을 텐데!

다음에 얘기하려는 것이 그 실례의 하나다.
2년 전 나는 누벨 프랑스 쪽으로 산보를 갔었다. 거기서 더 멀리 나갔다가 몽마르트르 언덕을 지나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그때 내 무릎을 짚는 사람이 있었다. 시선을 얼른 그쪽으로 돌렸다. 대여섯 살쯤 된 사내아이가 정다운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아원으로 보낸 내 아들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그 아이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고 두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걷다 보니 허전한 생각이 들어서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 아이와 너무 빨리 헤어진 것이 허전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동작에서 나는 영감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되돌아서서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안아서 추어주었다. 빵을 살 만한 돈을 쥐어 주면서 아버지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인상이 사나운 사내가 있는 곳으로 나보다 먼저 가는 그 아이를 보았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도 그 험상궂은 사내는 내게 호의를 가진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들 부자가 있는 곳에서 떠났다. 그 후 그 아이에게서 느꼈던 기분이 이따금 떠올라 거기를 지나칠 때마다 혹시 그 아이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기대해 봤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즐거웠던 일들을 가끔 환기시켜 음식을 되새김질하듯 즐거운 부분만 반추하면서 행복을 누린다. 아주 곤궁한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동전 한 닢을 얻은 거지의 기쁨은 황금 주머니를 옷 속에 지닌 부자의 기쁨보다 더 큰 것이다. 나를 늘 감시하고 다니던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가며 맛보는 그런 종류의 자잘한 기쁨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알면 모두 비웃을는지 모른다. (이하 생략)

                       

                                   ... 장 자크 루소(J. J. Roussau) <고독한 산보자의 꿈> 옮긴이 염기용, 범우사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