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지금은 그것이 벤[G.Benn]의 서한집이다),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독일 민요에 ‘햇빛에 가득 찬 하루는 행복하기에 충분하다??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거창하거나 보편타당하고 인류의 귀감이 될 만한 ‘엄청난 무엇’은 이미 나와는 멀어졌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괴로워하는 일, 죽는 일도 다 인생에 의해서 자비롭게 특대를 받고 있는 우선권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무엇일 것 같다. 괴로워할 시간도 자살할 자유도 없는 사람은 햇빛과 한 송이 꽃에 충족한 환희를 맛보고 살아나간다.
하루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 우주에게, 신에 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전혜린<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010-수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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